J O K E R

J O K E R

2019, Oct 08    

2019년 10월 2일,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JOKER가 개봉되었다. 폭발적인 관심과 논란을 일으키며 5일만에 관객 수 200만을 넘었다. 대담한 각본과 장면들로 인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Denial of Smile

웃으면 복이 온다? 그러나 여기 웃을 때마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하는 한 남자가 있다.

아서 플렉은 광대 복장을 하고 거리에서 “해피”하게 일을 하다가 10대들에게 들고 있던 광고판을 빼앗기고 쓰레기 가득한 뒷골목에서 흠씬 두들겨 맞는다. 어린이 병원에서 소품으로 사용한 권총 때문에 해고당하고,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도 기이한 웃음 때문에 집단 구타를 당한다. 또 화장실에서는 토마스 웨인 앞에서 발작적으로 웃다가 한 방 얻어 맞는다. 아서 플렉의 웃음은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그의 웃음은 항상 부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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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ial of Existence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서 플렉의 꿈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하지만 그 출발부터 이미 실패한다. 관객보다 먼저 터지는 웃음, 아무 때나 나오는 발작적인 웃음 때문에 코미디언으로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페니 플렉조차 그의 꿈을 이해하지 못한다. 재능 없는 열정은 가혹한 현실 앞에서 부정된다.

Don’t you have to be funny to be a comedian?

심리 상담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그를 부정한다.

“You don’t listen, do you?”

아서는 상담때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참담한 상황을 말했지만 매번 기계적인 질문만이 반복되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솔직히 말하기를 그만 두었을 것이다.

그는 고담시의 언론과 사람들이 광대 살인마에게 관심을 갖자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이제까지 질문만 하던 상담사의 유일한 반응은 부정으로 가득하다.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어요.”

“They don’t give a shit about people like you, Arthur.”

페니 플렉의 편지를 몰래 읽은 아서는 토마스 웨인을 찾아가지만 그의 존재는 매정하게 부정된다. 더구나 출생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입양아임이 드러나자 자신이 헌신적으로 보살폈던 어머니에 대한 그의 사랑 역시 부정되고 만다. 아서의 망상에서 비롯된 소피와의 로맨스도 부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우상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 초대받지만 면전에서 대중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영웅적 살인은 어리석고 비겁한 범죄로 부정된다.

“It doesn’t make sense”

그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변명이 되고, 비겁함이 되고,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모욕과 구타로 짓밟힌다. 아서는 이것을 뒤틀린 유머로 풀어내지만 이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는 썰렁한 노잼 유머일 뿐이다.

“I just hope my death make more cents than my life.”
여기서 sense를 cents로 적은 것은 “Latte는 말(語)이야, 말(馬)이야”처럼 동음을 이용한 저수준의 유머인 듯 싶다.

Dialectical Violence

이제 많은 히어로 영화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는 악당을 압도적인 힘으로 응징하는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 “조커”에서 그 영웅은 억압된 자의식 속에서 늘 불안하다.

머레이 쇼에 출연한 아서 플렉은 마치 그의 삶처럼 구겨진 노트에 쓴 “I just hope my death make more cents than my life.”을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려 한다. “아닌 척”하던 아서 플렉의 삶을 마감하고 보다 확실하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폭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선포한다.

아서의 죽음으로 다시 태어난 조커의 폭력은 그 어떤 틈도 주지 않고 즉시 격렬하게 실행된다. 그것은 일말의 자비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오싹하다. 한 때 동료였던 랜달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할 때도, 페니 플렉을 질식시킬 때도, 머레이에게 총을 쏠 때도 단 한번의 망설임이 없다. 우울했지만 선량했던 아서의 삶은 사라지고 화려하고 처절하게 우스꽝스러운 죽음의 “조커”가 나타난 것이다.

더러운 뒷골목에서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쓰러져 있던 광대 아서 플렉과 총을 맞고 쓰러진 토마스 웨인 모두 폭력의 희생자들이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의 분배는 모두에게 공정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동시에 그것은 배트맨의 폭력은 “정의”이고 조커의 폭력은 “불의”라는 식의 명확한 선악구도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반증한다.

Danse Macabre

억압적 현실로부터 자유를 얻은 조커의 폭력성은 기괴한 춤으로 표현된다. 전철에서 세 명을 죽인 후 정신없이 뛰어들어간 공중 화장실에서 보여준 음산하고 뒤틀린 몸짓은 나약한 아서 플렉이 잔혹한 살인마로 변태하는 과정이다.

자살을 결심하고 머레이 쇼의 스튜디오로 향할 때, 계단을 내려오면서 보여주는 그 경쾌하고 힘찬 춤은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계단 위에서 형사들은 과거의 아서를 잡으려고 하지만 계단 아래에서 조커가 되어버린 현재의 아서 플렉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더 이상 그 계단을 힘겹게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군중은 그들의 영웅 조커에 열광하며 고담시의 위선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토마스 웨인이 괴한의 총격으로 쓰러지던 바로 그 때 조커는 일어나 부서진 경찰차 위에 선다. 광기가 만들어낸 무대,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비로소 그는 꿈을 이룬다. 흘러 내리는 자신의 피로 입가에 광대의 미소를 그린다.

머레이 쇼에서 조커는 신랄하게 사람들의 위선을 비난한다.

“if it was me lying on the streets you would just walk past me!”

앞으로 누구도 조커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주위로 모여드는 폭도들의 함성과 함께 고담시는 어둠 속에서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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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d in the clowns

영화의 마지막, 우울하고 어두운 상담실의 아서는 밝고 흰 옷을 입은 조커로 변해있다. 불치의 병이 주는 고통스러운 웃음 대신 스스로 즐거운 일을 떠올리며 웃는 남자, 조커가 남은 것이다. 그는 농담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You wouldn’t get it.”

무엇이 웃기는 일이고 무엇이 슬픈 일인지,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인지 그 경계의 모호함 속에 조커는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를 불편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던지는 말인지도 모른다.

엔딩 크레딧에 프랭크 시나트라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흐른다. “Send in the clowns” 이것은 해피 엔딩인가? 이 영화가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이유는 바로 오늘 우리가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