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tman
배트맨은 1939년 “탐정” 만화책에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최근 워너브러더스에서 제작한 “The Batman”은 8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전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만들어진 “배트맨” 영화만 해도 여러 편이 된다. 1989년 팀 버튼의, 그야말로 만화같은 배트맨에서부터 2005년 크리스토퍼 놀란의, 지나치게 진지한 척하는 배트맨까지 다양한 색채를 가지는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2022년 “The Batman”은 확실히 이런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그(The)” 배트맨인가?
배트맨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의 배경은 대동소이하고 범죄와 맞서는 명분과 동기를 해석하는 것은 비슷하다. 배트맨은 태생적으로 권선징악의 구도가 분명하기 때문에 액션 영화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3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이라는 차별적인 요소와 함께, 지금까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그렇게 정의되고 소비될 수 밖에 없었던 배트맨과는 다른 버전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배트맨을 초인으로 설정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경쟁력이 없을 것이다. 소위 “마블 유니버스”류의 말도 안되는 능력을 가진 CG 영웅들에 비하면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그저 돈이 많아서 첨단 장비에 의존하는 고도화된 자경단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그렇게 뛰어난(?) 액션 장면이 없었던 것은 그 어떤 현란한 액션도 주목을 끌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신에 원점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탐정” 만화의 주인공 배트맨으로 어필한다. 바로 “The” 배트맨은 처음 만화책에 등장한 80년 전의 그 배트맨, “Detective Comics - The Bat-Man” 이라는 본원적 의미인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과장해서 말하면 흉기조차 독특하다. 날카롭기도 하고 둔중하기도 한 평끌로 고담 시장을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장면은 배트맨의 멋진 활약으로 오프닝을 장식하는 기존 영화들과는 “공포스럽게” 다르다. 날렵하게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배트맨이 아니라 패거리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 역시 영화의 분위기를 조금 더 현실로 끌어당긴다. 배트맨은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시민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운 존재이며(이 장면과 후반부의 구조 장면에서 배트맨을 대하는 시민의 태도는 전혀 반대이다) 고담시의 경찰들도 적개심을 드러낸다.
범죄 현장에 남겨진 증거들을 바탕으로 살인자의 흔적과 동기를 추적하는 전개는 진부한 구조일 수 있다. 그러나 긴장감과 흥미를 지속시키는 요소는 브루스 웨인의 부모에 대한 숨겨진 과거사이다. 기존 영화들에서는 도덕 교과서에 나올만한 훌륭한 부모님을 둔 것처럼 묘사되지만, 조커(2019, 토드 필립스)에 등장하는 토마스 웨인처럼 이 영화에서도 다소 위선적이고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마피아 보스 팔코네 같은 사람들과도 엮여 있는 현실성 있는 고위층 인사인 것이다.
또 다른 차별성은 인종이다. 최근에 헐리우드 영화계에서는 “화이트 워싱”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역으로 “블랙 워싱”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단 악역들과 폭력배들은 모두 백인들이고 제임스 고든 경위와 캣우먼-셀리나 카일은 모두 흑인이다. 또 고담시의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여성 흑인이다. 기득권층에는 어쩔 수 없이 백인들이 많을 테지만 블랙 워싱은 아무래도 의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배트맨을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의 창백한 모습은 어둡고 우울한 브루스 웨인과 잘 어울린다. 브루스 웨인은 정의에 대한 신념보다는 고통스러운 유년 시절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 때문에 배트맨이 된다. 하지만 고담시의 모든 범죄에 혼자 맞서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모하고 의미도 없다. 브루스 웨인에게 정의를 지킨다는 대의명분은 처음부터 허상이며, 사실은 복수에 대한 집착과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심리적 방어일 수도 있다.
오히려 토마스 웨인과 팔코네와의 거래를 알게 되었을 때 웨인 가문 “family’s legacy” 역시 부패한 권력과 범죄 카르텔의 일부였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면서 혼란에 빠진다. 역설적으로 리들러야말로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이며 나름의 정당한 이유로 고담시의 위정자들과 범죄자들에게 복수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배트맨 영화들 속에 등장하는 악당들은 배트맨과 많이 닮아 있다. 자신을 가면 속에 숨기며 사람들의 편견에 분노한다. 인격적으로 뒤틀려 있는 불행한 천재들인 것이다.
You’re a part of this, too.
How am I a part of this?
You’ll see.
폴 다노가 연기한 리들러는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만하다. 그는 커다란 안경을 쓴 온순한 모범생처럼 보인다. 폭력과 거리가 먼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이지만 마스크를 쓰는 순간 무자비한 살인자로 변한다. 마스크는 본성을 숨기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배트맨의 마스크 역시 같은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고담 시장의 당선 축하 무대를 습격하는 수많은 리들러 추종자들을 응징하는 것은 영화 속 배트맨의 당연한 역할이다. 하지만 리들러가 마스크를 쓰고 숨이 찰 정도로 시장을 내리치듯 배트맨 역시 리들러 추종자를 수없이 내리치는 장면에서 리들러와 배트맨은 서로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정의를 실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피투성이로 쓰러진 폭도는 말한다. “나는 복수다”
광기로 흥분한 리들러는 추종자들에게 소리를 지른다.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면서 되묻던 그 질문을 이제 고담의 시민들 자신들이 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You’ll be there, waiting. It’s time for the lies to finally end. False promises of renewal? CHANGE? We’ll give them real, real change now. We’ve spent our lives in this wretched place, SUFFERING! Wondering, “Why us?” Now they will spend their last moments wondering, “Why them?”
영화의 결말은 흔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고담시의 위기는 새로운 시장의 리더쉽과 시민들의 참여로 극복될 수 있다는 상투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배트맨-브루스 웨인도 고담시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각성한다. 붉은 조명을 높이 들어 사람들을 이끄는 장면은 다소 신파적인 느낌이 들긴 해도 배트맨이 “고담의 기사”로 거듭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Our scars can destroy us, even after the physical wounds have healed. But if we survive them, they can transform us. They can give us the power to endure, and the strength to fight.
영화는 캣우먼과의 작별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마이클 지아치노의 사운드 트랙도 괜찮은 편이다. 어스름한 저녁 각자의 길을 향해 달리는 두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캄 정신병동에 갇힌 조커의 웃음소리가 고담시를 다시 어떤 혼란 속으로 몰아넣을지 속편을 예고하는 엔딩아닌 엔딩.
And you know, Gotham loves a comeback story.
배트맨은 더 어두워져야 한다.